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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취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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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취암

        경남 산청군 신등면 둔철산로 675-87

        신라시대 686년(신문왕 6년) 의상조사가 창건했다.
        고려 말기 공민왕 때 중수되고, 조선시대 중기 효종 때 화재로 전소되었다.
        그 후 치헌선사(致憲禪師)가 암자를 중수했다.
        1987년에 대웅전을 다시 짓고 1995년에 응진전을 건립하고, 1996년에 산신각을 중수했다.
        산신각에 걸려 있는 산신탱화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정취암의 문가학(文可學) 설화

         고려 말 지금의 산청군 신안면 소이리에 문가학(文可學)이란 분이 살고 있었다. 그는 어릴 적에 형 문가용(文可庸)과 더불어 재질이 뛰어났다. 둘 다 문과에 급제하여 가용은 학유(學諭)가 되고 가학은 내한(內翰) 벼슬을 하였다.

         가학이 둔철산(대성산) 정취암에서 과거 공부를 하고 있을 때다. 정월 초하루가 가까워지자, 스님들이 모두 절을 비우고 다른 곳으로 피신한다며, 가학에게 집에 가라고 했다. 가학이 이유를 물으니, 스님들이 설날 밤에 요사한 괴물이 나타나서 나이 어린 스님이나 얼굴이 예쁜 사람을 잡아간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가학이 그런 요사한 괴물에 겁을 먹고 도망갈 수 있느냐고 했다. 그리고 내가 괴물을 맞상대해 보겠다며, 술 한 동이와 안주를 자기 책상 밑에 두고 피신하라고 했다.

         설날 밤이 깊어지고 가학이 책을 읽고 있는데, 밖에서 방안을 엿보는 인기척이 났다. 가학이 누구냐며 문을 열어보니 아름다운 여인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가학이 반기며 여인을 방안으로 들이고, 술과 안주가 있으니 설날 밤을 함께 술 마시며 놀자고 말했다. 동이의 술이 바닥날 즈음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여인은 사람이 아니고 늙은 여우였다. 가학은 여인을 꽁꽁 묶었다. 날이 새면 스님들에게 보이고 죽이려 한 것이다.

         술이 깨며 묶인 사실을 알아차린 여우가 가학에게 둔갑할 수 있는 비책이 있는데, 살려주면 둔갑하는 책을 주겠다고 말했다. 가학은 여우의 잔꾀를 시험하는 셈으로 그러자고 하고, 묶은 여우를 어깨에 메고 여우가 가르치는 석벽으로 갔다. 석벽에는 깊은 굴이 있었고, 그곳에 둔갑술을 적은 책이 있었다. 가학이 여우를 풀어주자, 여우는 동이 트기 전에 책을 다 읽으라고 했다. 동이 틀 무렵 마지막 페이지가 남았을 때 여우가 잽싸게 책을 빼앗아 석벽을 타고 달아났다.

         이후 가학은 둔갑술을 연습하고 익혔다. 그러나 여러 형상으로 둔갑을 해도 몸을 완벽하게 감출 수 없고, 윗옷의 옷고름이 남아 바람이 불면 옷고름이 나풀거렸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지 못한 탓이다.

         가학이 과거에 급제하여 내한 벼슬을 하고 있으면서 자주 둔갑술을 부렸다. 그러다가 발각되고 전국에 체포령이 내렸다. 어느 날 포졸들에게 쫓기어 위급한 순간, 가학이 무덤가의 석상으로 둔갑했다. 그러나 석상의 옷고름이 나풀거려서 들키고,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이후 소이리에 있는 가학의 집은 불타 없어졌다.

         이 설화는 1635년경 단성 출신 이시분이 단성현의 인문지리와 행정 등을 편집한 책 『운창지(雲窓誌)』에 실려있다. 한편 가학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금을 놀라게 하고, 임금으로부터 은 기둥을 선물 받고는 큰 새로 둔갑하여 날아서 고향 집으로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