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안내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 숭모회

        단계천 백의종군로 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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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계천 백의종군로 고증과 복원

         충무공 이순신의 백의종군은 1597년(정유년) 4월 1일부터 동년 8월 3일까지 120일의 여정이었다. 120일 중 경남지역에서 70여 일(56.5%) 종군하고, 여타 충남 등지에서 50여 일을 종군했다. 백의종군한 길은 약 640km에 이른다. 이중 경남지역이 약 162km(25%)이고, 경기·충청지역이 약 340km, 전북·전남지역이 약 138km이다.

         백의종군한 길은 1997년 경상남도가 단계에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 추모탑”을 건립하면서 옛길을 찾고 순례길로 조성하기 시작했다. 경상남도는 2006년에 또다시 백의종군 길은 고증하고 순례길을 정비했다. 그로부터 ‘백의종군로’, ‘백의종군 순례길’이란 용어가 공식 용어가 되었다. 이후 2015년 해군본부에서 실시한 백의종군로 고증 용역을 순천향대학교 이순신 연구소에서 수행하고, 충남도와 전북도 등에서 백의종군로 정비 사업을 추진하여 백의종군로가 전국적으로 정비되었다.

         단계천은 백의종군에 있어 의미가 매우 깊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6월 2일(음력) 단계 시냇가에서 오락가락하는 비를 맞으며 아침밥을 먹었다. 전날 밤은 비가 억수로 내렸다. 『난중일기』에는 “저물녘에 단성과 진주의 경계에 사는 박호원(朴好元)의 농사짓는 종(노비)의 집에 투숙했다. 잠자는 방이 좋지 않아서 간신히 밤을 지냈다. 비가 밤새도록 내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방이 누추하고 비가 새어서 잠을 설쳤을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박호원의 종의 집에서 새벽 일찍 출발했다. 밤잠을 설치니, 일찍 나서는 것이 나아서 그랬을 것이다. 그곳에서 단계까지는 대략 12km의 거리다. 아침에 단계천에 도착했으니, 비를 맞으며 상당히 바쁘게 걸은 셈이다. 이순신 장군은 민폐를 끼친다며 마을로 들어가지 않고, 단계천을 건넜다. 그리고 시냇가에서 아침을 드셨다. 아마 불을 지펴 밥을 하기 곤란하여 주먹밥 따위로 때웠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시냇가의 어디에서 아침을 드셨을까? 당시의 단계천은 지금의 단계마을과 들판 사이로 흐르는 단계천과 다르다. 단계천은 1920년(경신년)에 대홍수로 인해 물길이 크게 바뀌었다. 홍수 이전에는 단계천이 단계초등학교와 뒷산 사이로 흘렸다. 1970년대까지도 그곳에는 제법 큰 개울이 있었다. 한편 초등학교 뒷산에서 아래쪽의 벽계마을까지 이어진 산은 깎아지른 절벽이거나 경사가 심하여 여럿이 말을 매어두고 편히 앉아 쉴만한 곳이 없다. 따라서 아침을 드신 장소는 단계천을 건너서 들판 끝자리의 자갈과 모래가 뒤섞여 깔린 시냇가일 것이다. 그곳은 지금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 추모탑” 옆에 흐르는 단계천의 중간쯤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하면 단계천의 아침이 백의종군하는 120여 일 중에서 심신이 가장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단계천에서 아침을 드신 이순신 장군은 불과 서너 시간 거리에 있는 삼가현에 그날 늦게 도착한다. 도중에 인적이 드문 곳에서 심신을 달래며 점심을 드시고 휴식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동년 7월 19일에 단계천을 다시 건넜다. 즉 단계천을 두 번 건너다녔다.

         단계에서 삼가현(三嘉縣)에 가는 백의종군로가 애매모호하다. 이순신 장군은 6월 2일 늦게 삼가현에 도착했다. 단계와 삼가는 먼 길이 아니다. 오늘날 포장된 지방도로도 약 12km에 불과하다. 단계마을을 피해 가는 처지에서 단계천은 오래 머물 곳이 못 된다. 그러면 왜 늦게 삼가현에 도착했을까? 어떤 길로 갔고, 어디에서 쉬었을까?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할 당시 단계에서 삼가현에 가는 길은 세 갈래가 있었다. 첫째는 현재 지방도가 놓여있는 가회마을을 거쳐 가는 길이다. 이 길이 약 12km로 멀다. 둘째는 단계 위의 청산과 사정마을을 거쳐 연산마을로 가는 길이다. 첫째보다 거리가 훨씬 줄어든다. 셋째는 단계마을 건너편의 두곡마을과 산 넘어 간공마을을 거쳐 삼가현에 가는 길이다. 이 길이 가장 짧은 지름길이다. 1970년대까지도 이 지름길을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현재 이 길은 사람이 다니질 않아 흔적조차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면 어느 길이 백의종군로일까? 의문을 푸는 열쇠는 간공(艮公)마을의 지명에 있다. 당시 단계와 삼가 사이에 간공마을은 없고, 인근에 연산마을이 있었다. 따라서 혹자는 연산마을로 가는 둘째 길을 백의종군로라고 한다. 얼핏 그리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간공 지명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120여 년이 지난 1759년 영조 때 지어졌다. 공식 지명은 관청에서 짓는 것이므로, 아무렇게 작명하지 않는다. 무언가 작명하는 연유와 근거가 바탕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간공 지명에서 공(公)은 어떤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이고, 간(艮)은 움직임을 멈춘다는 뜻이 있다. 따라서 간공은 ‘충무공이 멈추어 머문 곳’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의미 있는 지명이 또 있다. 갈공실(渴公實)이란 지명이다. 두곡마을에서 간공마을로 가기 위해 고개를 넘으면 바로 마주치는 작은 들이다. 갈공실은 '공(公)이 목이 말라서 물을 마셨다'라는 뜻인데, 지금도 이 들을 갈공실이라 부른다. 이렇게 간공마을과 갈공실이란 지명이 백의종군로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오늘날 간공마을 출신들은 ‘충무공이 멈추어 쉰 곳이어서 간공으로 이름 지어졌다’라는 이야기가 대대로 전해왔다고 한다. 결국 이순신 장군은 단계천을 떠나 지금의 간공마을 언저리의 산수 좋고 아늑한 곳에 이르러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점심을 드시고 휴식함으로써, 늦게 삼가현에 도착했다고 할 것이다.

         한편 간공에서 삼가현에 가는 길이 두 갈래 있다. 하나는 연산마을을 거쳐 삼가면 송죽마을로 가는 길이고, 또 하나는 간공에서 약간 아래로 내려와서 삼가면 농암 골로 가는 길이다. 1970년대까지 단계와 삼가 간의 왕래는 후자의 길로 다녔다. 따라서 지금 순례하고 있는 단계와 삼가 간의 백의종군로는 잘못 고증되었다고 할 것이다.

         우리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 숭모회”는 단계와 삼가 간의 백의종군로가 새로이 고증되고, 재조명되고, 복원되기를 바란다.

        글쓴이 : 공 창석(백의종군 숭모회 회장, 전 경남도행정부지사)